앞선 두 편에서는 채용공고를 열어봤습니다.

토스는 디자인 직무 여섯 개를 두 개로 줄였고, 당근은 Design Engineer라는 새 역할을 만들었습니다.

법무와 마케팅, 개발에서는 직무와 직무 사이에 비어 있던 자리가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경계를 정하는 주체가 회사였다는 점입니다.

회사가 직무를 나눴고, 새 역할을 만들었고, 어떤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힐지 정했습니다.

노동자는 그 공고를 보고 지원할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AI와 자동화가 실제 일의 경계를 바꿀 때, 그 경계를 정하는 방식이 회사의 결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교섭입니다.

2026년 국내 완성차 교섭에서 그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바꾸자고 한 것은 두 글자였습니다

기아 노동조합이 2026년 단체협약 개정 요구안에서 제출한 항목 가운데 하나는 신기술 도입 절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기존 단체협약에는 신프로젝트 개발이나 신기술·신기계 도입의 계획 단계에서 회사가 노동조합에 통보한다는 취지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노조는 이를 협의로 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두 글자입니다.

하지만 의미는 작지 않습니다.

통보는 회사가 정한 뒤 알리는 것입니다.

협의는 결정 전에 상대의 의견을 듣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단순한 문구 수정이 아니라, 신기술 도입의 경계를 누가 정할 것인가에 관한 요구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국내 완성차 단체협약에는 신기술 도입 관련 절차가 이미 있었습니다.

AI가 등장해서 처음 만든 조항이 아닙니다.

공장에 새로운 설비와 자동화 기술이 들어오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노사관계에도 그에 대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2026년의 쟁점은 새 조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절차의 강도를 한 단계 높일 것인가였습니다.

알려주는 데서 끝낼 것인가.

아니면 결정 과정에 들어오게 할 것인가.

앞선 두 편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합니다.

채용공고에서는 회사가 역할의 경계를 다시 그렸습니다.

여기서는 노동조합이 그 경계를 정하는 과정에 들어가겠다고 요구합니다.

현대차는 임금 계산 방식을 문제 삼았습니다

같은 해 현대차 노동조합의 요구 가운데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완전 월급제입니다.

이 요구는 신기술 도입 그 자체보다, 자동화 이후 남는 사람의 조건에 관한 문제입니다.

현대차 생산직은 시급제를 기반으로 하고, 잔업과 특근이 실제 급여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자동화가 확대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공정이 빨라지고,

사람이 직접 해야 할 작업이 줄고,

잔업과 특근이 감소할 수 있습니다.

고용이 유지되더라도 급여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조는 근무시간 변화와 무관하게 보다 안정적으로 임금을 보장하는 완전 월급제를 요구했습니다.

자동화의 영향을 일자리 수로만 보면 이 문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일자리는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해고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을 만드는 방식이 바뀔 수 있습니다.

즉 자동화가 흔드는 것은

“사람이 남느냐 사라지느냐”만이 아니라,

“남은 사람의 일이 어떤 값으로 계산되느냐”이기도 합니다.

AI와 자동화가 실제 업무에 들어오면 고용, 직무, 임금, 근무시간이 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를 바꾸면 다른 조건도 함께 흔들립니다.

요구와 결과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교섭에서는 어디까지 합의됐을까요.

노조의 요구와 최종 합의를 놓고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기아 노사는 미래 산업전환과 고용안정을 다루는 별도 합의를 체결했습니다.

합의문의 표현은 회사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종업원의 고용이 안정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방향이었습니다.

노조가 요구했던 것은 더 강했습니다.

신기술 도입 과정에서 노동자의 총고용을 보장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기아 노조가 요구했던 ‘통보 → 협의’ 변경 역시 공개적으로 확인되는 최종 합의에서 반영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현대차의 완전 월급제 요구도 최종 합의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현대차의 AI·로보틱스 관련 합의는 진행 경과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노사가 공동 대응한다는 수준에 가까웠습니다.

고용에서는 2027년 200명, 2028년 300명의 기술직 신규 채용이 합의됐습니다.

요구와 결과를 나란히 놓으면 이런 흐름이 보입니다.

보장은 노력으로, 결정 과정 개입 요구는 정보 공유로 낮아졌습니다.

즉 2026년 교섭에서 확인된 것은 신기술 도입에 대한 강한 공동결정권이라기보다,

정보 접근과 대응 절차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에 더 가까웠습니다.

해외에서도 먼저 확보되는 것은 ‘알 권리’였습니다

이 결과를 한국 노사관계의 특수한 문제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순서가 보입니다.

미국 UPS와 Teamsters의 단체협약에는 신기술 도입과 관련해 일정 기간 전에 노동조합과 협의하는 절차가 들어 있습니다.

독일은 사업장조직법을 통해 신기술과 작업절차 변화에 관한 정보 제공과 협의를 제도적으로 요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통지와 정보 제공은 비교적 널리 확보돼 있지만, 기술 도입 자체를 중단하거나 거부할 권한까지 인정되는 경우는 훨씬 드뭅니다.

즉 노동자가 가장 먼저 확보하는 것은 기술 도입을 결정할 권리보다,

무엇이 들어오는지 알고,

어떤 영향을 주는지 확인하고,

그 결과를 협의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걸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보권이 다음 단계의 출발점이라는 해석입니다.

무엇이 바뀌는지 알아야 근무조건이나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고 다음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이 정보 제공과 협의 정도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앞으로의 교섭에서 확인될 것입니다.

정부도 같은 시기에 경계를 그었습니다

2026년 9월 3일, 고용노동부는 노동쟁의 대상과 관련한 시행지침을 발표했습니다.

AI와 자동화에 관한 핵심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AI·자동화 설비 도입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의무적 교섭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기술 도입으로 근로조건의 변화가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정부 지침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교섭 가능한 영역으로 제시했습니다.

구조조정에 따른 배치전환.

고용안정 대책.

근무시간 조정.

작업방식 변경에 따른 안전보건 대책.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정부도 회사의 기술 도입 결정 자체와,

그 기술 때문에 사람의 일과 조건이 어떻게 바뀌는가는 다른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즉 정부가 그은 선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떤 기술을 도입할지는 경영의 영역이지만, 그 결과 노동자의 일과 근로조건이 바뀐다면 교섭의 영역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기아 노조의 ‘통보 → 협의’ 요구와 바로 만납니다.

노조는 기술 도입의 결정 과정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려 했고,

정부 지침은 기술 도입 자체보다는 그 결과가 근로조건에 미치는 부분을 교섭 대상으로 분리했습니다.

같은 경계를 서로 다른 위치에 긋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침은 교섭이 끝난 뒤 나왔습니다

시점도 중요합니다.

현대차와 기아를 포함한 완성차 업계의 2026년 교섭이 마무리된 뒤 고용노동부 지침이 발표됐습니다.

즉 2026년 완성차 교섭은 이 지침을 실제 기준으로 삼아 진행된 교섭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침의 실질적인 효과는 2027년 이후 교섭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노사 양쪽의 반응도 엇갈렸습니다.

노동계는 교섭 대상을 지나치게 좁게 잡았다고 비판했고,

경영계는 반대로 AI 도입에 따른 배치전환까지 노동쟁의 대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며 우려했습니다.

같은 지침을 놓고 양쪽이 반대 방향에서 불만을 제기한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경계가 아직 안정적으로 정해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섭이 할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섭이 회사의 일방적인 결정에 대한 완전한 대안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적용 범위입니다.

2023년 기준 국내 노동조합 조직률은 13.0%였습니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격차는 더 큽니다.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는 조직률이 높지만, 규모가 작아질수록 빠르게 떨어집니다.

특히 30명 미만 사업장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0.1%였습니다.

13.0%와 0.1%를 나란히 놓으면 평균만 봐서는 보이지 않는 문제가 드러납니다.

교섭을 통해 AI와 자동화의 경계를 함께 정할 수 있는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일부에 불과하고,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사실상 그 선택지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완성차처럼 노조 조직률이 높고 교섭구조가 안정된 대기업에서는

신기술,

고용,

근무시간,

임금,

작업방식을 노사 테이블에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중소사업장에서는 그런 테이블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AI는 대기업에만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업장에서도 테이블에 앉는 사람은 다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경계가 보입니다.

같은 기업집단 안에서도 모든 노동자가 같은 방식으로 교섭에 접근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차 정규직 노조가 AI와 로봇 도입을 교섭 의제로 다루던 시기,

같은 그룹의 다른 노동자들은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권리 자체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AI를 어디까지 도입할 것인가”를 테이블에서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은 “그 테이블에 누가 앉을 수 있는가”를 먼저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AI 시대의 노사관계 문제는 기술 하나를 교섭 의제로 넣느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누가 그 경계를 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세 편을 놓고 보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1편에서는 회사가 직무의 경계를 다시 그리는 장면을 봤습니다.

토스는 기존 직무를 합쳤고, 당근은 새로운 역할을 만들었습니다.

2편에서는 기존 직무 사이의 빈 자리가 보였습니다.

법률가는 기술 쪽으로 나갔고,

기술자는 마케팅 조직 안으로 들어왔고,

개발자는 AI 능력이 바뀔 때마다 사람과 AI의 경계를 다시 조정하는 역할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3편에서는 같은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봤습니다.

그 경계를 누가 정할 것인가.

채용공고에서는 회사가 정합니다.

단체교섭에서는 노사가 함께 정하려고 합니다.

정부는 법과 지침으로 그 바깥의 선을 긋습니다.

AI가 실제 업무에 들어오면 결국 어딘가에서는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무엇을 AI에게 맡길 것인가.

어디까지 맡길 것인가.

사람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 변화로 생기는 비용과 위험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준을 누가 정할 것인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경계를 정하는 근거입니다

2026년 교섭은 한 가지 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기아 노조는 ‘통보’를 ‘협의’로 바꾸려 했지만 그 요구가 그대로 관철된 것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현대차 노조는 자동화 이후의 임금체계 문제를 제기했지만 완전 월급제가 합의된 것도 아닙니다.

정부는 AI 도입 자체와 근로조건 변화의 경계를 나누는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각자 선을 그었지만 선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여기까지는 AI에게 맡기고,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개입해야 한다고 정할 것인가.

기술의 가능성만으로 정할 것인지.

비용을 기준으로 정할 것인지.

고용 영향을 볼 것인지.

임금과 근무시간까지 볼 것인지.

안전과 평가, 감시까지 포함할 것인지.

그리고 그 판단 과정에 누가 참여할 것인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만들어지는 중입니다.

2027년 교섭에서는 2026년에 만들어진 정부 지침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적용될 것입니다.

기아의 ‘통보 → 협의’ 요구와 같은 문제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형태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때 봐야 할 것은 단순히 노조가 무엇을 요구했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경계를 정하는 과정에 들어왔고, 어떤 근거가 실제 합의로 남았는가.

AI가 일을 바꾸는 순간,

기술보다 먼저 다시 정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권한의 경계인지도 모릅니다.

참고한 공개 자료

  • 고용노동부 「경영성과급 등 노동쟁의 대상 시행지침」 보도자료, 2026년 9월 3일
  • 고용노동부 개정 노동조합법 해석지침 및 시행령 개정 관련 자료, 2026년
  • 고용노동부 전국 노동조합 조직현황, 2023년
  • 국가지표체계 노동조합 조직률
  • Teamsters UPS National Master Agreement 관련 공식 자료
  • 독일 사업장조직법(BetrVG) 관련 조항
  • 현대차·기아 2026년 임단협 관련 노사 발표 및 복수 언론 보도

※ 현대차·기아의 2026년 노조 요구안과 최종 합의문 전문은 모두 공개된 상태가 아닙니다. 본문의 일부 문언은 복수 언론과 노사 발표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내용에 근거했습니다. 정확한 조항 번호와 전후 문맥은 원문 전문이 공개될 경우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