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이 변호사에게 코딩 경험을 묻는다는 공고를 봤습니다.
이제 변호사도 코딩을 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공고를 직접 열어봤더니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가장 먼저 적혀 있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변호사 자격과 실제 분쟁 경험이었습니다.
글로벌 로펌 Gibson Dunn이 런던에서 채용하는 Legal Technology & AI Attorney – International Disputes는 잉글랜드·웨일스 변호사 자격을 필수로 요구합니다.
소송·중재 같은 분쟁 실무 경험도 최소 4년이 필요합니다.
코딩이나 개발 경험은 그다음입니다.
공고에는 개인적이든 직업적이든 코딩이나 기술 기반 구축 경험이 있으면 높게 평가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왜 로펌은 기술자를 찾는 대신, 법률 실무를 깊이 아는 변호사에게 기술 경험까지 묻기 시작했을까요.
다른 직무의 공고도 몇 건 더 열어봤습니다.
예상과 조금 다른 변화가 보였습니다.
기존 직무가 일제히 AI 직무로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직무와 직무 사이, 또는 기존 직무의 경계에 전에는 분명하지 않았던 자리가 생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로펌은 법률 실무자를 기술의 경계로 내보냈습니다
Gibson Dunn의 Legal Technology & AI Attorney가 하는 일은 전통적인 변호사 업무와 조금 다릅니다.
분쟁 업무 가운데 어디에 AI와 자동화를 적용할 수 있는지 찾습니다.
AI 기반 리서치와 문서분석 도구를 시험합니다.
초안 작성과 지식 추출의 흐름을 다시 설계합니다.
새로운 도구가 실제 법률업무에 맞는지 검증합니다.
다른 변호사들이 AI와 지식관리 시스템을 사용하는 방법을 교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의 출발점은 기술이 아닙니다.
법률 실무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결과가 법적으로 위험한지.
어떤 문서는 고객에게 그대로 전달하면 안 되는지.
어떤 사안은 AI가 분석할 수 있어도 반드시 변호사가 다시 봐야 하는지.
어디까지 자동화하면 효율이 되고, 어디를 넘으면 전문직 책임 문제가 되는지.
이런 경계는 AI 기술만 안다고 정하기 어렵습니다.
실제 사건을 다뤄본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AI가 전문직 업무 안으로 들어올수록 전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I가 어디까지 일해도 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같은 로펌은 전혀 다른 사람도 뽑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Gibson Dunn이 Director of Legal Innovation and AI라는 역할도 따로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의 자리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변호사 자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학력도 JD, MBA 또는 컴퓨터공학·AI 관련 고급 학위 가운데 하나면 됩니다.
대신 AI·머신러닝 전략, 기업 기술 또는 법률기술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요구합니다.
하는 일도 다릅니다.
로펌 전체의 AI 사용을 관리합니다.
어떤 AI 도구를 도입할지 평가합니다.
정확성, 보안, 기밀성, 사용성, 시스템 연계 가능성, 비용을 비교합니다.
외부 벤더와 계약을 협상합니다.
AI 예산과 투자수익률을 경영진에게 보고합니다.
AI의 오류와 환각을 어떻게 시험할지,
사람의 검토를 어느 단계에 둘지 같은 운영 기준도 관리합니다.
같은 로펌이 하나의 문제를 두 층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법률 실무자가 AI와 실제 사건 사이의 경계를 정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조직 차원에서 어떤 AI를 어떤 조건으로 운영할지 정합니다.
하나는 실무의 경계이고,
다른 하나는 경영의 경계입니다.
두 자리를 나란히 놓으면 “변호사도 AI를 배운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큰 변화가 보입니다.
마케팅에서는 사람이 반대 방향에서 들어옵니다
마케팅 분야의 공고를 보면 이동 방향이 달라집니다.
Figma가 채용하는 Marketing Engineer, AI Deployment는 마케팅 조직 안에서 AI 기반 시스템을 만드는 역할입니다.
AI 사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케터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할 도구와 에이전트를 만듭니다.
프롬프트와 지식 기반을 관리합니다.
API와 여러 시스템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이 도구들이 실제 성과를 내는지도 봅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성과 측정 방식입니다.
실제로 반복해서 사용되는 AI 시스템이 몇 개인지.
얼마나 많은 수작업 시간을 줄였는지.
그 결과 매출 파이프라인이나 전환에 어떤 효과를 냈는지.
이런 지표로 역할의 성과를 평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 역할은 콘텐츠를 만들던 기존 마케터가 AI를 조금 더 잘 쓰게 된 모습과는 다릅니다.
운영과 데이터, 시스템을 다루던 기술형 인력이 마케팅 조직 안으로 들어온 모습에 가깝습니다.
WPP Media의 싱가포르 AI Technical Developer 공고는 더 직접적입니다.
이 역할은 AI 에이전트가 여러 단계를 이어서 수행하는 업무 흐름을 코드로 만들고,
광고 플랫폼 API를 연결하며,
실제 캠페인 팀이 사용할 AI 시스템을 구현합니다.
필요 경력도 마케팅보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사례를
“마케터가 AI 에이전트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
고 해석하면 지나칩니다.
현재 공고가 보여주는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마케팅 조직이 기술자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개발 쪽은 이미 한 바퀴 더 돌았습니다
같은 변화를 가장 앞에서 겪고 있는 분야는 개발입니다.
Anthropic의 Staff+ Software Engineer, Claude Managed Agents 공고를 보면 코드를 잘 쓰는 것은 이미 출발점입니다.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AI 에이전트가 몇 시간에서 며칠씩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해야 합니다.
작업이 끊겨도 복구되게 해야 합니다.
세션과 메모리를 관리해야 합니다.
도구 호출과 접근 권한을 관리해야 합니다.
여러 에이전트를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의 품질을 평가하는 체계까지 만들어야 합니다.
공고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에이전트를 움직이는 구조에는 항상
“현재 모델이 아직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한 가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델의 능력이 좋아지면 그 가정은 금방 낡습니다.
어제는 반드시 사람에게 넘겨야 했던 일이 내일은 AI가 직접 할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새로운 능력이 생기면서 새로운 위험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발자의 역할은 시스템을 한 번 잘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모델의 능력이 바뀔 때마다 사람과 AI의 경계를 다시 점검하고, 품질 기준을 다시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경계를 한 번 정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갱신하는 일이 직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분야를 놓고 보면 같은 자리가 보입니다
법무, 마케팅, 개발은 전혀 다른 분야입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도 다릅니다.
법무에서는 도메인 전문가가 기술 쪽으로 걸어갑니다.
실무 변호사가 AI와 법률업무 사이의 경계를 맡습니다.
마케팅에서는 반대입니다.
기술자가 도메인 안으로 들어갑니다.
엔지니어가 마케팅 조직 안에서 AI가 실제로 일할 시스템을 만듭니다.
개발에서는 기술과 AI가 이미 만났습니다.
이제는 모델 능력이 바뀔 때마다 사람과 AI의 경계를 계속 다시 정하는 역할이 커지고 있습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생기는 자리는 비슷합니다.
AI가 실제로 일하게 되는 지점에서, 무엇을 맡기고 어디서 멈추며 무엇을 기준으로 결과를 확인할지 정하는 자리.
어떤 조직에서는 직무와 직무 사이에 새 역할을 만듭니다.
어떤 조직에서는 기존 직무의 책임을 넓힙니다.
어떤 조직에서는 기술 인력을 현업 조직 안으로 넣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타나는 변화를 새로운 AI 직무 몇 개의 등장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기존 조직에서 비어 있던 경계 역할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하는 일은 놀랄 만큼 비슷합니다
직무 이름은 모두 다릅니다.
그런데 공고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질문은 비슷합니다.
AI에게 어떤 문제를 맡길 것인가.
AI가 어떤 정보와 도구에 접근하게 할 것인가.
무엇을 좋은 결과라고 판단할 것인가.
어떤 결과는 반드시 사람이 확인할 것인가.
무엇이 잘못되면 자동 실행을 멈출 것인가.
어떤 예외는 사람에게 다시 넘길 것인가.
모델이 좋아지면 기존 기준 가운데 무엇을 다시 바꿀 것인가.
결국 이 경계 역할의 중심에는 단순한 AI 활용 기술보다
목표,
기준,
권한,
평가,
예외,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이 비슷하다고 답까지 같지는 않습니다.
법률에서 허용할 수 있는 위험과,
마케팅에서 허용할 수 있는 브랜드 위험과,
소프트웨어에서 허용할 수 있는 시스템 위험은 다릅니다.
그래서 이 역할은 AI 기술만 잘 안다고 맡기 어렵습니다.
도메인 전문성과 기술 이해가 만나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누가 그 자리에 앉을지는 조직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공고들이 평균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확인한 회사는 Anthropic, Figma, WPP Media, 그리고 글로벌 대형 로펌 Gibson Dunn입니다.
AI를 가장 앞에서 다루는 기업이거나,
높은 수준의 전문인력과 기술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이 회사들의 현재 모습이 일반 기업의 몇 년 뒤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국내에서도 AI 도입은 산업 전체에 고르게 퍼진 상태가 아닙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산업별 AI 활용도 실태조사 결과 분석」은 전국 21개 산업 2,297개 사업체를 조사했습니다.
이 가운데 AI를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업체는 656곳,
전체의 28.6%였습니다.
업종별 차이는 컸습니다.
정보통신업의 AI 도입률은 62.9%로 조사 대상 산업 가운데 가장 높았습니다.
즉 AI 활용은 이미 적지 않게 확산되고 있지만,
산업마다 속도 차이가 상당합니다.
이 글에서 본 채용공고는 평균적인 기업의 현재 모습이라기보다, AI 활용이 빠른 영역에서 먼저 나타나는 변화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이 공고들을 곧바로 미래 직무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지금도 익숙한 직무 이름과 익숙한 조직구조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보는 것은 평균이 아니라 먼저 나타난 신호입니다.
조직개편은 이해관계 조정에 시간이 걸립니다.
제도를 바꾸는 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사람이 달라지면 채용공고는 먼저 움직입니다.
공고 몇 건이 미래를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어디에서 새로운 역할이 먼저 필요해지고 있는지는 보여줄 수 있습니다.
경영자가 물어야 할 것은 새 직무 이름이 아닙니다
이 사례들을 보고 곧바로
“우리도 AI 담당자를 만들어야 하나”
라고 결론 낼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다른 질문이 필요합니다.
우리 조직에도 비어 있는 경계가 있는가
AI가 실제 업무에 들어왔는데,
누가 어디까지 맡겨도 되는지,
어떤 결과를 믿어도 되는지,
언제 사람이 다시 봐야 하는지를
명확히 정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입니다.
AI를 개인 생산성 도구로만 쓰고 있다면 아직 이런 역할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AI가 고객에게 답하고,
문서를 만들고,
판단을 지원하고,
실제 시스템을 실행하기 시작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힐 것인가
Gibson Dunn은 실무 변호사를 기술의 경계로 보냈습니다.
Figma와 WPP는 기술형 인력을 현업 조직 안으로 넣었습니다.
둘 다 가능한 방식입니다.
문제는 우리 조직에는 어느 방식이 맞느냐입니다.
업무 맥락이 중요한가.
기술 복잡성이 더 큰가.
규제와 책임이 중요한가.
내부 사람을 키울 것인가.
외부에서 데려올 것인가.
이 질문에 따라 답은 달라집니다.
무엇으로 성과를 평가할 것인가
새 역할을 만들어도 평가 기준이 없으면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Figma는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AI 시스템 수,
줄인 수작업 시간,
사업 성과 기여 같은 지표를 제시합니다.
법률조직이라면 같은 지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류 감소.
검토시간 단축.
리스크 회피.
지식 재사용.
전문직 책임 준수.
다른 기준이 필요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AI를 많이 사용했는가”가 아니라, 이 역할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지를 먼저 정하는 것입니다.
코딩 경험을 묻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로펌이 변호사에게 코딩 경험까지 묻는다는 것이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공고를 끝까지 읽고 다른 직무까지 비교해보니 코딩이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 뒤에는 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AI가 실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조직에 없던 경계가 생겼습니다.
누군가는 AI가 어디까지 법률업무를 해도 되는지 정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마케팅 조직 안에서 에이전트가 실제로 일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모델의 능력이 달라질 때마다 사람과 AI 사이의 기준을 다시 조정해야 합니다.
그 일을 누구에게 맡길지 아직 정답은 없습니다.
도메인 전문가가 기술 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기술자가 현업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새 직무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기존 역할의 책임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화는 이미 보입니다.
AI가 일을 맡기 시작하면, AI와 기존 직무 사이의 빈 자리를 누군가는 채워야 합니다.
지금은 일부 앞선 기업의 채용공고에서 먼저 보이는 작은 신호입니다.
앞으로 봐야 할 것은 새로운 직무명이 몇 개 더 생기는지가 아닐 것입니다.
그 빈 자리를 어떤 조직이 먼저 발견하고, 누구에게 맡기며, 어떤 기준으로 책임지게 하는가.
그 차이가 AI를 도입한 조직들 사이의 다음 차이를 만들지도 모릅니다.
참고한 공개 자료
- Gibson Dunn Legal Technology & AI Attorney – International Disputes, London
- Gibson Dunn Director of Legal Innovation and AI
- Figma Marketing Engineer, AI Deployment
- WPP Media AI Technical Developer, Singapore
- Anthropic Staff+ Software Engineer, Claude Managed Agents
- 한국고용정보원 「산업별 AI 활용도 실태조사 결과 분석」, 2026